[동감] 베트남 레(Le) 왕조(1428-1788)의 성군(聖君) 타인 똥(Thánh Tông, 聖宗) 황제 - 윤대영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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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레(Lê) 왕조(1428-1788)의 성군(聖君) 타인 똥(Thánh Tông, 聖宗) 황제

 

윤대영(서강대 동아연구소)

 

조선 왕조가 창건된 지 36년째 되는 해인 1428년에 베트남을 명나라의 지배(1407-1427)로부터 구해 낸 레 러이(1385-1433)는, 타인 호아 출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동 낀(현재의 하 노이)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이 비엣’이라 하고 새로운 레 왕조(1428-1788)를 창건했다. 조선에서는 제4대 왕 세종(1418-1450 재위)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업적을 많이 남겨 현재에도 성군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베트남에서는 레 왕조의 제4대 황제 타인 똥이 바로 비슷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제2대 황제 타이 똥(1434-1442 재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타인 똥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타이 똥의 장자이면서 태자로 책봉되었던 응이 전은 생모가 질투가 많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가 1459년 이복동생 년 똥(1443-1459 재위)을 살해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타인 호아 출신 개국 공신들은 1460년 6월 ‘반정’을 일으켜 응이 전과 그의 추종자들을 몰아내고 타이 똥의 넷째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 황제가 바로 타인 똥으로, 그의 치세 동안 베트남은 대내적으로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 01_ 레타인똥 : 타인 호아 지역 레 왕조 태묘 ( 太廟 ) 에 전시되어 있는 타인 똥 황제의 초상화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조정에서 전개된 권력 다툼과 무기력했던 황제들을 목도해야만 했던 그는 명의 제도를 도입하여 황제 친정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12개의 도로 개편된 지방 행정 조직에는 행정권, 감찰권, 치안권이 분산되었다. 아울러, 촌락의 지도자인 사장(社長)을 촌민들이 직접 추천하게 함으로써 지방관의 권력 집중화 현상을 방지하는 한편, 촌락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했다. 타인 똥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1460년부터 호적 작성을 본격화할 수 있었고, 1470년부터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해서 토지대장을 작성하여 수정, 보완하도록 했다.


산업 진흥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타인 똥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1474년부터 제방의 수리나 관개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던 황무지 개간과 간척 사업을 독려하면서 그 결과를 토지 면적 측량을 통해 보고하도록 했다. 특히, 변경 지대에 설치된 둔전을 통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병사로서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또한, 양잠을 장려하거나 광산을 개발하기 위한 각종 정책이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1477년에는 전국의 현, 주, 촌락에 새롭게 시장을 개설하여 물자의 유통과 판매를 활성화함으로써 국가 경제에 생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 02_ 문묘 : 11 세기에 창건되어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하노이의 문묘 ( 文廟 )


타인 똥의 치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현존하는 베트남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국조형률』(國朝刑律)의 편찬이다. 당률(唐律)을 기본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하고 있는 이 법은 군주의 권익을 옹호하고 있는 것 이외에도, 형벌 체계가 남녀에 따라 달리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국조형률』에 포함되어 있는 부인의 재산권 보장 조항, 딸의 재산 상속권 및 제사 상속권 조항 등을 고려한다면, 타인 똥은 중국법과는 차별적인 베트남의 전통적인 규범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484년 당시 자의에 의한 혹은 타의에 의한 무분별한 낙태를 엄금한 타인 똥의 사회 정책은 과거의 폐습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지적 분위기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는 유학의 보급과 장려도 타인 똥 시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게 되었다. 즉위 초기인 1463년부터 기존에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던 회시를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했으며, 1467년에는 처음으로 오경박사를 두고 오경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또 국립대학도 증축하여 강의실, 도서실, 기숙사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타인 똥의 유학 정책과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타인 똥 자신의 학문이 성리학 중심의 유학적 흐름에만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위 초부터 “겉만 화려하고 쓸모없는 학문”을 경계하라는 고관 응우옌 바 끼의 충고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게 된 타인 똥의 도리관(道理觀)에 의하면, “도(道)는 당연한 일로서 명백하여 알기가 쉽고, 이(理)는 그렇게 된 연고로서 미묘하여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理)’를 규명하기 위해 “박학”을 표방하게 된 타인 똥은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과거 시험에 “당대의 주요 사안”이나 “이학(理學) 및 수학” 관련 내용을 출제하기도 했다.

 

* 03_ 대월사기전서 : 대월사기전서

 

 


문화 정책과 관련된 타인 똥의 업적도 다양한 양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명 지배기에 유실된 베트남 자료들을 복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서적들을 수집하여 편찬 사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지시를 받은 응오 씨 리엔은 쩐 왕조(1225-1400) 때에 레 반 흐우가 지은 『대월사기』(大越史記)에다 당시의 자료를 보완하여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1479)를 발간했다. 건국 신화에서부터 레 러이가 왕조를 세우는 1428년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이후에도 계속 속편이 간행되어 베트남 전통시대를 연구하기 위한 기본 사료로서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유학을 통해 습득한 한문 이외에 쯔 놈(chữ nôm)에도 조예가 깊었던 타인 똥은 1463년부터 신하들이 쯔 놈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장려했으며, 1468년에는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던 쯔 놈 문자를 규격화하여 반포했으며, 참파 원정 당시인 1471년에는 전쟁 지침서의 내용을 쯔 놈으로도 간행하여 각 병영에 내려 보낸 적도 있었다.